김자점의 옥 [ 金自點-獄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반역행위로 야기된 옥사.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자 병자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김상헌(金尙憲) 등 신하와 협의하여 청(淸)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본래 친청파(親淸派)였던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된 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 그 소식을 듣고 청나라 관계 요인에게 밀고하는 한편,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청나라에 보냈다. 이 지문에서는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명(明)나라 연호를 썼으므로, 이에 청나라는 대군(大軍)을 국경에 배치하고 그 진부를 힐문(詰問)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노력으로 일단 수습되었으나, 1651년(효종 2) 12월 진사 신호(申壕) 등이 다시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를 고하였다. 효종이 인정문(仁政門)에서 김자점의 아들 익(익) 등을 심문하자 익은 공모한무장들을 모두 실토하여 여러 명이 희생되었으며, 인조의 후궁 조귀인(趙貴人:효명옹주의 어머니)이 그의 며느리인 숭선군(崇善君)의 아내 신씨(申氏)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귀인을 사사(賜死)하는 한편, 김자점 및 그의 손자이며 조귀인의 사위인 김세룡(金世龍)을 국문하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김자점의 일파는 완전히 숙청되었다.
김자점 [ 金自點]
[익원공파]. 자 성지(成之). 호 낙서(洛西). 성혼(成渾)의 문인.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광해군대(代)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인목대비 폐모론이 발생한 이후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반정을 기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자 1등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또한 순검사(巡檢使) 한성판윤 등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고 강직하다는 평판을 얻기도 했으나,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였다.
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간관들의 비난 속에 유배에 처해졌으나, 1640년(인조 18) 1월 강화유수로,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다. 계속된 비난 속에서도 인조의 비호를 받아 승진을 거듭, 1644년에는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 이후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고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후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 후에도 인조의 신임 아래 정권을 담당하면서 청(淸)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는데, 반청적인 성향의 임경업(林慶業)을 처단하는 데 앞장선 것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효종 즉위 이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산림(山林) 세력들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뒤에 아들 익(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